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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공산성 둘러보기!!

봥대장 2020. 2. 14. 0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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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봥대장입니다.

저번주에 공주를 다녀왔습니다.

공주를 가서 공산성에 다녀왔는데 생각보다 크고 아름답더라고요.

공산성은 웅진 백제시기를 대표하는 왕성으로 백제의 대표적인 고대 성곽이라고 합니다.

백제의 숨결을 느끼러 가보겠습니다.

 

 

 

공산성 둘러보기!!

입장료가 있습니다.

성인기준 개인이 1,200원

어린이와 청소년이 800원이었습니다.

 

그 외에도 통합권으로 송산리고분군(무령왕릉) + 석장리박물관(구석기) + 공산성을 세트로

성인기준 2,800원 어린이와 청소년이 1,800원에 판매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1. 공주시민

 

2. 교류도시 시민

경주시, 경기도 광주시, 나주시, 상주시, 양주시, 여주시, 영주시, 원주시, 전주시, 제주시, 진주시, 청주시, 충주시, 파주시

 

3. 자매결연도시

서울 송파, 관악구

경기 이천, 부천, 구리

경북 안동

인천 계양구

 

분들은 신분증 지참시 무료!!

전 그래서 무료!!!!

 

 

고마열차도 운영하나독 하는데 동절기라 현재 운행은 안한다고 합니다.

 

 

 

입구에는 유네스코에서 인정했다는 세계유산 백제역사 유적지구라는 비석이 크게 서있습니다.

 

 

그 옆으로는 많은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저 멀리 공산성의 서쪽 문루인 공산성 금서루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공산성은 총 4개의 성문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공산성 영동루 (동문)

가장 먼저 소개할 문은 동쪽에 위치한 영동루이다.

공산성 영동루는 공산성의 4개의 성문 가운데 동쪽 문루로 백제시대 성벽이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다.

1980년 발굴 당시 문 터와 문 양옆에서 문을 지탱하고 있던 받침들을 확인하였다.

조사에서 얻은 자료와 1859년(철종때 편찬된 공산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1993년 조선시대 성문의 일반적인 모습으로 다시 세웠다.

문루의 이름을 알 수 없어서 2009년 시민 공모를 거쳐 영동루라고 지었다.

 

공산성 금서루 (서문)

공산성 금서루는 공산성 4개 성문  가운데 서쪽 문루이다.

성 안으로 이어지는 도록를 만드는 과정에서 흔적조차 찾기 어려웠지만 1859년에 편찬된 공산지의 문헌 기록과 지형적 여건 등을 고려하여 1993년에 복원하였다.

현재의 문루는 본래 서문이 있던 자리에서 약간 남쪽으로 이동하여 지은 것이다.

금서루는 비록 새롭게 복원된 것이지만 조선시대 성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공산성 진남루

공산성 진남루는 공산성의 남문이자 정문이며 조선시대에는 삼남의 관문이었다.

공산성은 사방에서 문터가 확인되는데, 그중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는 성문이 남아 있지만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다.

이에 1993년 동문 터에는 영동루를, 서문 터에는 금서루를 다시 세웠다.

진남루는 여러 차례 고쳐 지었지만 그 위치와 모습은 본래의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 있는 성문은 1971년에 전부 해체하고 다시 세운 것이다.

 

 

 

공산성 공북루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쪽 문루로 금강의 남쪽과 북쪽을 오가는 남북 통로의 주 출입문이다.

본래 공북루 자리에는 망북루가 있엇는데 허물어져 터만 남아 있었다.

충청감영을 충주에서 공주로 이전하면서 1603년(선조때)에 공산성을 크게 고쳐 쌓고, 이때 공북루와 그 옆에 원파당을 함께 지었다.

여러 차례 고쳐 지었으며, 월파당은 1954년에 철거되었다.

공북루의 아래쪽은 성으로 통하는 통로로, 위쪽은 마루를 만들어 금강의 아름다움을 즐기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문루 안에는 여려 편의 글과 시를 걸어 두었다.

 

 

이렇게 4개의 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공산루를 보러 가볼까요?

 

올라가는 길은 조금 가팔랐습니다.

 

하지만 고진감래라는 말이 있듯이 올라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올라간 다음의 풍경은 정말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먼저 제가 들어온 공산성 금서루쪽 풍경입니다.

 

확실히 옛날에는 적군의 침입을 막기에는 괜찮았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가파른 산위에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대쪽의 모습입니다.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시야가 탁 트이는게 가슴까지 시원해지는 기분이었습니다.

 

바로 앞에 금강이 흐르니 더 더욱 보기 좋은 풍경을 자아냈던 것 같습니다.

아마 백제시대의 사람들도 완벽히 똑같지는 않겠지만 이러한 절경을 보며 살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공산성(公山城)

그리고 기다리던 공산성입니다.

 

백제가 서울 한성에서 웅진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웅진 도성 안에 있었던 왕성이다.

북쪽으로 금강이 흐르는 해발 110m 공산의 능선과 계곡을 따라 쌓은 천연의 요새로, 성벽의 전체 길이는 2,660m에 이른다.

백제시대에는 흙으로 쌓은 토성과 돌로 쌓은 이름은 처음에 웅진성으로 불렀다가 고려시대 초에는 공산성,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백제 무왕 31년 사비(부여)의 궁궐을 수리할 때 5개월 동안 머물렀으며, 660년 백제 멸망기에 의자왕이 일시적으로 머물렀다.

이후 웅진도독부, 통일신라시대 웅천주의 치소가 있었으며, 조선후기에는 충청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고 , 이괄의 난 때에는 인조가 이 성으로 피난하였다.

 

성 안에는 백제시대 추정 왕궁터를 비롯하여 임류각과 연지 등 백제왕궁 관련 유적과 4곳의 문지(금서루, 진남루, 공북루, 영동루), 쌍수정, 쌍수정사적비, 명국삼장비, 영은사, 연지 및 만하루 등 백제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6

 유적들이 남아있다.

2015년 7월 8일,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공산성 왕궁관련유적

또한 길을 따라 가다보면 공산성 왕궁 관련 유적지도 있습니다.

이 공터가  왕궁관련 유적지라고 합니다.

 

구역이 나누어져 있으며 그 앞에는 추정되는 건물에 대한 설명이 적혀있었습니다.

 

 

 

 

공산성 역사 체험장이라고 있는데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곳인가 생각했지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옛날에 발굴조사때를 대략적으로 전시해놓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주말에가서 따로 운영을 하지 않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주산성 공주 잠종냉장고

공주 잠종냉장고는 충청남도에 있는 잠업 농가에 누에 씨를 보금하기 위햇 만든 지하 저장 시설이다.

1914년 충남잠업강습소가 공주에 생기면서 누에를 치는 보관소와 뽕밭이 새로 조성되었다.

 

누에의 먹이인 뽕잎이 나는 5월까지 누에의 부화를 늦추기 위해 잠종냉장고가 공산성에 만들어졌다.

겨울철 금강의 얼음을 왕겨에 싸서 잠종냉장고에 넣어 두면 여름 내내 녹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를 이용하여 누에의 부화 시기를 늦추었다.

 

공산성 내의 잠종냉장고가 이쓴 지역을 '빙고재'라고 하는데, '공산지'에는 공산성 안에 빙고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조선시대 빙고 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쭉 내려가다보면 특이하게 생긴 조형물을 볼 수 있었습니다.

 

 

공산성 연지와 공산성 만하루

공산선 연지

공산성 안에서 사용하는 물을 저장하던 연못이다.

발굴 조사결과 조선시대 기와와 자기조각 등이 확인 되었다.

백제시대에는 영은사 앞쪽에 연못이 있었으나 조선시대에 이 자리로 연못을 옮겼다.

'여지도서'에 공산성에 물이 부족하여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연못을 만들어 강물을 끌어다 썼으며 만하루라는 건물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다.

연지는 아래로 내려갈수록 폭이 좋아지는 모습니다.

윗부분은 길이 22m, 너비 11.5m이고 아랫부분은 길이 9m, 너비 4m이며 깊이는 10.2m이다.

동쪽과 서쪽 벽에는 40cm 크기의 배수로가 있어 물이 쉽게 흐르도록 하였다.

 

만하루에서 본 풍경

공산성 만하루

만하루는 연못과 금강 사이에 있는 누각이다.

현재 만하루 앞쪽에 있는 성벽은 조선시대에 확장한 것으로 공산성을 방어하는 군사적 기능과 함게 경치를 감상하던 기능으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홍수ㅜ로 무너진 후 1982년 발굴 조사 과정에서 건물 터를 확인하였다.

연못과 함께 '여지도서'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현재 누각은 8각으로 다듬은 기둥 받침돌을 그대로 이용하여 다시 세운 것이다.

 

 

 

이번에는 공산성에 있는 누각들에 대해서 알아볼까 합니다.

모든 누각을 다를 수는 없지만 제가 조사한 누각에 대해서 설명드려볼까 합니다.

 

 

 

공산성 쌍수정

공산성 쌍수정은 충청도 관찰사 이수향이 1734년(영조때)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조선의 제 16대 왕인 인조(1623~1649년 재위)는 1624년 이괄의 난을 피해 공산성에서 6일간 머물렀는데 당시 인조는 두 득루의 나무 아래에서 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인조는 난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며 자신이 기대었던 두 그루의 나무, 즉 쌍수에 정3품의 벼슬을 내렸다.

그 후로 공산성을 '쌍수산성'으로 부르게 되엇다.

 

이수향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있던 자리에 삼가정을 세웠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오늘날의 쌍수정은 1970년에 해체한 후 다시 세운 것으로 조선시대의 쌍수정과 다소 차이가 있다.

 

 

 

공산성 임류각

임류각은 백제 제24대 동성왕 22년에 왕궁의 동쪽에 지은 누각이다.

높이가 15m에 이르는 건물로 왕과 신하들은 연회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0년에 2층 눅가으로 다시 세웠다.

현재의 임류각은 백제 건축 양식인 하양식을 재현하여 세웠으며, 단청 문양은 무령왕릉에서 나온 장신구와 무덤방의 벽돌에 남겨진 무늬를 활용하였다.

 

 

 

공산성 광복루

공산성 광복루는 공산성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2층 누각이다.

공산성안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의 문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에 지금의 위치로 옮기고 웅심각이라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공주 시민들이 힘을 모아 보수하였다.

이듬해인 1946년 4월에 김구, 이시영 등이 공주를 방문하여 이곳을 둘러본 후 광복을 기념하기 위해 이름을 광복루로 고쳤다.

 

 

마지막으로 공산성의 재미있는 것은 깃발이 주기적으로 계속 변한다는 것입니다.

동서남북의 위치에 따라 깃발의 색상이나 문양이 다른데 깃발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공산성 깃발이야기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이다.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신의 개념이나 형상이 표현된 것은 삼국시대에 중국 문화의 전래와 함께 시작되엇다고 볼 수 있는데 송산리6호분 벽화의 사신도는 당시 왕성했던 백제와 중국 남조와의 국제교류를 보여준다.

깃발의 바탕색은 황토색이다.

이것은 백제의 나라색이며 백제시대 사람들은 황색을 우주의 중심이 되는 색으로 생각하여 중히 여겼다고 한다.

그리고 깃발의 테두리는 사신도의 각 동물이 상징하는 색을 반영한 것이다.

깃발의 배치는 송산리6호분에 그려진 사신도의 위치를 그대로 따랐다.

따라서 동쪽에는 청룡, 서쪽에는 백호, 남쪽에는 주잔, 북쪽에는 현무를 각각 매치하였다.

 

 

 

저는 처음에 설명을 읽지 않고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는데 이상하게 계속 깃발의 색상과 문양이 바뀌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열심히 찾아보며 다녔지만 아쉽게도 황토기는 사진에 담지 못하였습니다.

 

 

둘러보는 거리도 적당해서 저는 이곳저곳 꼼꼼히 둘러보다보니 약 1시간 30분정도 둘러본 것 같습니다.

혼자오시는 분들보다는 가족단위로 아이들과 오시는 분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산책겸, 공부겸 둘러보기에는 정말 좋은 곳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공산성 야경사진을 남기며 마무리해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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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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